절정

출처를 잃어버린 인용 (update, 2010.10.06)

9.
1인칭과 2인칭 사이에 당신과 내가 있습니다.
나는 1.3인칭이고 당신은 1.7인칭,
1.3+1.7=3, 우리는 3인칭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텍스트가 있습니다. 텍스트는
어느 봄날 당신과 내가 베란다에 나와서 잡고 턴 이불입니다.
그 출렁임입니다.
햇살에 빛나는 먼지의 춤입니다.

모든 시인은 하납니다.
모든 시는 무의식의 자서전입니다.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 시집 뒷면 작가의 말, 문학과 지성사)



10.
어딘가에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線)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썼었다.
삶은 어딘가에 금이 가고 있는데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파열을
깨닫는다. 단편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중략) 그리고 소설의 끝에서, '어젯밤'에 생긴 일 덕분에 이제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 인물들이 망연한 표정으로 독자를 바라본다.
그것은 삶이 진실에 베일 때 짓는 표정이다.
나도 당신도 그런 시간 속에 정지 화면 처럼 서 있었던 적이 있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이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까?' 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러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리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신형철, 이야기의 에티카, 연세대 문화학과 워크샵 자료에서 일부 발췌, 2010.10. 05)



(2010. 08. ?? - 10. 05)

1.
(생략) 자신과 마주한다는 것이 공동-내의-존재의 법과 의미 자체여야 한다.
바로 거기에 사유 작업에서의 강령이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즉시 이러한 다른 강령이 따라 나온다.
마주한다는 것은 그것이 이해될 때, 상호 파괴가 마주함의 가능성 자체와 더불어 공동-내의-존재의 가능성
또는 함께-있음의 가능성까지 파괴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장-뤽 낭시, 마주한 공동체, p. 108)



3중의 기이함. 멀어져 간 타자의 기이함, 퇴각한동일자의 기이함, 확실하지 않으며 아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향해 돌아선 역사의 기이함. 친절을 가장하면서 너무나 많이 낭송된 '이타주의적' 도덕에 반대해, 이방인과의 준엄한 관계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이방인의 기이함은 실존과 현전의 조건이다. 또한 우리 고유의 생성과 우리의 찢긴 상처에서 나오는 어두운 광휘 앞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것을 붙들고 있어야만 한다.
(장-뤽 낭시, 마주한 공동체, p. 109)



2.
"자신의 타자가 되어, 결코 도래하지 않는 죽음에,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의 회귀인 죽음"
(블랑쇼, 재난의 글쓰기, p.114~15)



3.

자유 혹은 자율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타자의 '자유'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칸트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것을 보편적인 도덕법칙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이 아니라'라는것이다. '타자를 수단으로 대하는'것을 피하기 어렵다. 실제로 우리는 분업과 교환에 의해 살고 있는데, 그것은 타자를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중략)
자본제 사회에서의 자유는 타자를 목적(자유로운 주체)으로 대하는 것을 희생시키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4.
나의 형성이 내 안에 타자를 포함한다는 것,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이질성이 역설적이게도 나와 타자들의 윤리적 관계의 출발점을 이룬다는 것, 나를 이루는 것의 일부가 타자들의 수수계끼적인 흔적들임을 인정한단 것, 자신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불확실함이 있다는 것을 일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윤리, 상실과 허약함의 경험에서 출현하는 전혀 다른 연대의 가능성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옮긴이의 말)


"나의 형성이 내 안에 타자를 포함한다는 것, 다름아닌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이질성(foreignness)이 역설적이게도 나와 타자들의 윤리적 관계의 출처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나를 이루는 것의 일부가 타자들의 수수께끼적인 흔적들이기에 나 자신에 대한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환원 불가능한 방식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알거나 다른 이들과 다른 나의 "차이"를 알 수 없다." (p.79)

나는 상처를 입었고 바로 그 상처는 내가 자국이 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고 또 내가 완전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타자에게 양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점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타자와 별도로 고립된 채 책임감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처음부터 책임감이란 문제의 틀을 이루는 관계적 구속에서 나를 떼어 낸 것이다.(p.80)


아드리아나 카베로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은 우리가 이성적 존재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노출되어 있고 인정받는 자를 인정하는 자로 대체하지 않는 인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5.
가자, 저 중심으로
살아서 가자
살아서, 여럿이, 중심으로
포로된 삶으로부터
상처의 핵심으로
해방의 징으로

(황지우, 나는 너다, '징' 중에서 일부 발췌)



6.
(00시인이) '나는'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면서 일시적으로 겨우 어떤 형태를 이루는 분말 같은 것을 연상하게 한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감각의 지배적인 분배체계 안에 위치가 지정되지 않은 무엇인가를 시는 출현시켜야 한다. 분배 체계 안에서 시를 쓰는 것에 저항하는 것은 시쓰기의 윤리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김행숙, '랑시에르식으로 말하면' 대담, 376)




7.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작가의 말중에서)


8.
사랑이란, 절정으로 승화된 순간을 말하는 것이며 가득찬 순간,
자기 의식과 타의 의식이 완전히 하나가 된 순간을 말할 것이다.

순간은 포착되어 응결시켜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 '순간'들이 생의 가치의 전부인 것을
생각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떤 허망하고도
엄숙한 감동을 갖게 된다.

(전혜린, 사랑을 받고 싶은 본능,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